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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사였고, 신부였으며,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정체성 앞에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사랑하는 자'로 살았던 이태석 신부. 세상의 가장 낮고 먼 곳, 남수단 톤즈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삶을 불태웠습니다. 아무 대가도 없고, 어떠한 명예도 없었던 그 땅에서, 그는 오직 한 가지 이유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으로 진료하시는 이태석 신부님 가상 모습 재현(AI)
사랑으로 진료하시는 이태석 신부님 가상 모습 재현(AI)

이 글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감동적인 생애, 그가 걸었던 톤즈의 길, 그리고 그가 남긴 깊은 신앙의 울림을 되짚어 보려 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의 삶에서 참된 ‘헌신’과 ‘믿음’을 다시 배웁니다.

이웃을 위한 삶의 증언 – 이태석 신부, 가난한 땅에 뿌린 사랑의 씨앗

 

1. 의사이자 선교사, 그리고 신부 – 이태석은 누구인가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된 인물입니다. 그는 신학교 시절 남수단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결심대로 그는 2001년, 남수단 톤즈라는 작은 마을로 떠났습니다. 이곳은 가난과 내전, 질병으로 피폐해진 지역이었습니다. 의료 시설은 전무했고, 깨끗한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이 신부는 이 열악한 곳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2. 톤즈와의 운명적 만남 –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다


톤즈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의 상처와 질병, 문맹, 폭력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그 땅에 머물렀고, 병든 이를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전했습니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진료소를 열었고, 처음엔 주사기와 약 몇 가지로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줄을 이었고, 고통받는 이를 보며 그는 더욱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의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을 빌려 그분의 마음으로 치료할 뿐입니다.”

3. 약보다 사랑을 먼저 건넨 사람


이태석 신부의 의료 활동은 단순한 진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몸이 아픈 것도 괴롭지만, 마음이 상한 이들이 더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자에게 먼저 말을 걸고,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때로는 아무 약도 없이, 한참을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진료 방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고아들도, 전쟁 고아였던 소년들도 그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가 지어준 보건소는 지금도 ‘이태석 병원’이라 불리며, 그를 기억하게 합니다.

4. 음악으로 심은 희망 – 브라스 밴드의 기적


의사, 신부, 그리고 음악가였던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폐관 악기를 직접 수리해 가르쳤고, 아이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는 톤즈에 처음 울려 퍼지는 음악이었습니다.

그 밴드는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주었습니다. 연주회 때마다 사람들은 울었고, 아이들은 “우리가 이렇게 훌륭해질 수 있구나”라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희망의 선율이었습니다.

5. 죽음을 넘어 울리는 생명 – 그가 남긴 진료소와 교육의 씨앗


이태석 신부는 2008년,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 기쁘다”고 말하며 미소지었습니다.

그가 떠난 이후, 톤즈엔 여전히 진료소가 운영되고 있고, 그의 제자들은 의대에 진학하여 ‘톤즈의 이태석’이 되겠다고 꿈꿉니다. 그의 사랑은 죽음조차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6. 신앙으로 완성된 사랑 – 기도와 섬김의 하루하루


그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했고, 기도로 끝났습니다. 진료와 교육, 악기 수업 사이에도 그는 늘 고요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숨 쉬는 것이었고, 삶 전체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그대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7.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이태석 신부는 완벽한 영웅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질보다 마음을, 기술보다 사람을, 그리고 기도보다 더 큰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이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많습니다.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닮고 싶은 신앙인 ⑨] 고통을 품은 어머니 –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 이소제, 딸의 순국을 믿음으

3.1운동의 불꽃처럼 타오르다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투쟁의 이면에는, 딸의 희생을 눈물로 받아들여야 했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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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무리 묵상 – 오늘의 톤즈, 그리고 우리의 삶


톤즈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하지만 그곳엔 더 이상 절망만이 있지 않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심은 씨앗이 자라, 자녀들이 학교에 가고, 음악을 배우며, 의료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누구를 위해 쓰고 있습니까?”

다음 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⑪]
“가난한 자들의 천사 – 최춘선 할아버지, 노숙자의 삶으로 복음을 산 거리의 순례자”
→ 다음 편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외면한 노숙인들의 곁에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던 최춘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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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및 출처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회 회보
천주교 살레시오회 공식 홈페이지
남수단 톤즈 진료소 기록
KBS 인간극장: “이태석 신부의 톤즈 일기” 편

◆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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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Role Models ⑩]

The Doctor Who Planted Hope – Father Lee Tae-seok and the Clinic of Love in Tonj


Introduction

He was a doctor, a priest, and a musician. But more than any title, he lived simply as one who loved. In Tonj, South Sudan—one of the poorest and most devastated regions—Father Lee Tae-seok gave his all. With no expectation of recognition or reward, he remained there for one reason only: to share the love he had received from God.

This article explores Father Lee’s life, his journey to Tonj, and the deep resonance his faith still echoes today. May we learn again the meaning of true devotion and belief through his story.

1. Who Was Father Lee Tae-seok?

Born in 1962 in Busan, South Korea, Father Lee Tae-seok studied medicine and served as an army doctor. Later, he entered the seminary and became a Catholic priest. During seminary, he heard about missionaries working in South Sudan and was deeply moved. He made a life-changing vow: to serve where help was needed the most.

He kept that promise. In 2001, he left for Tonj, a remote village in South Sudan afflicted by war, disease, and poverty. With almost no infrastructure or clean water, the people lived in unimaginable conditions. And yet, Father Lee chose to dedicate his entire being to them.

2. Tonj – A Fateful Encounter with the Poorest Land

Tonj was one of the most impoverished places on earth. Children grew up amidst the scars of war, lacking education, medicine, and hope. But Father Lee stayed, and day by day, he served them with healing, education, and spiritual care.

He began his medical work under a tree, with little more than a handful of supplies. As lines of sick and injured grew longer, he prayed more deeply and worked more tirelessly. “I am not the healer,” he said. “I merely borrow God’s hands.”

3. Healing with Compassion Before Medicine

Father Lee’s medical practice went beyond the physical. He believed the pain of the heart was often greater than that of the body. Before offering medicine, he smiled. He looked into patients’ eyes. He spoke gently, often embracing them and praying over them.

His clinic was more than a treatment center—it was a sanctuary. Orphans and children of war came to him not only for healing, but for love. They called him "Father," and the health center he built still bears his name today.

4. The Miracle of Music – A Brass Band of Hope

Father Lee was also a gifted musician. In Tonj, he collected damaged brass instruments, repaired them, and taught children how to play. His students formed the first brass band the village had ever seen.

That band changed lives. As they performed, villagers wept, and children began to believe: “We can be great.” For those who had only known despair, the sound of music brought dreams and dignity. It was a melody of hope.

5. Life That Resounds Beyond Death

In 2008, Father Lee was diagnosed with terminal colon cancer. He returned to Korea but showed no fear. He smiled and said, “I am ready. I’ve lived in God’s time, and I am joyful.”

Though he passed away, his love remains in Tonj. His former students have gone on to study medicine. They dream of becoming “the next Lee Tae-seok.” His legacy of care, education, and music lives on, untouched by death.

6. Faith in Action – Daily Life of Prayer and Service

His life was steeped in prayer. From dawn to dusk, amid medical work and music lessons, Father Lee remained in communion with God. Prayer wasn’t a duty for him—it was as natural as breathing.

He lived the gospel fully: “Whatever you did for the least of these, you did for me.” His life was a living sermon, spoken through service.

7. What We Can Learn from His Life

Father Lee was not a perfect hero—he was simply someone who gave all he had. He valued hearts over wealth, people over systems, and love over recognition. His life teaches us that living the Gospel is not about words, but about action.

His example calls today’s Christians and churches to reflection. To live like Christ is to live like Father Lee—giving, forgiving, and faithfully serving.

8. Final Reflection – Tonj Today and Our Own Mission

Tonj is still poor. But thanks to Father Lee, it is no longer hopeless. The seeds he planted have grown—children attend school, learn music, and dream of brighter futures.

His legacy asks us one piercing question:
“Who are you living your life for?”

9. Next Preview

[Faith Role Models ⑪]
The Angel of the Poor – Grandfather Choi Chun-sun, the Street Pilgrim Who Lived the Gospel with the Homeless
→ In the next story, we follow the life of Choi Chun-sun, who brought hope and prayer to the neglected and destitute, living the gospel among the homeless.

10. References

  • Don't Cry for Me, Tonj (Documentary)
  • Seoul National University Medical Alumni Association
  • Salesians of Don Bosco Official Site (Korea)
  • Tonj Medical Center Archives
  • KBS "Human Theater" – “Father Lee Tae-seok’s Tonj Diary” Episode

 

#LeeTaeSeok, #Tonj, #ChristianMissionary, #MedicalMission, #FaithInAction, #ChristianHero, #SouthSudan, #InspirationalFaith, #ChristianDoctors, #BrassBandHope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 다른 글 소개

 

[우울의 해부학 ⑤]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할까? – 만성 피로와 우울의 경계선

“밤새 푹 잤는데도 하루 종일 피곤해요.” “주말 내내 쉬었는데도 무기력하고 기운이 없어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말을 해봤거나 들어봤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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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해부학 ④] 신경전달물질의 전쟁 – 세로토닌, 도파민, 그리고 내면의 균형

“요즘 아무 의욕이 없어요. 그냥 무기력하고, 웃고 싶은데 웃음이 안 나요.” 이러한 말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마음’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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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와 정보

삶(생활)의 필요한 지혜와 정보(신체, 정신 건강, 여행,지역탐방, 맛집) 소개 및 꿀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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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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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처럼 타오르다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투쟁의 이면에는, 딸의 희생을 눈물로 받아들여야 했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소제 여사. 이름조차도 많은 이에게 낯선 이 분은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견뎌냈고, 딸의 죽음을 ‘하늘의 소명’으로 이해하며 조용히 신앙의 삶을 지켜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 이소제님의 생전 모습을 재현(AI)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 이소제님의 생전 모습을 재현(AI)


이 글에서는 유관순의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삶과 믿음을 중심으로, 신앙인의 모범적인 자세와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의 힘을 조명합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며, 딸을 하늘에 바친 어머니의 신앙”

 

아래 순서로 이분의 신앙의 발자취를 더등어 봅니다.
1. 한 여인, 이소제 – 유관순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
2. 신앙 속의 양육 – 어릴 적부터 심은 믿음의 뿌리
3. 유관순 순국 이후 –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믿음으로
4. 침묵의 신앙 – 말하지 않고도 전한 복음
5.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6. 닮고 싶은 신앙인의 참모습

1. 한 여인, 이소제 – 유관순의 어머니로 산다는 것


이소제 여사는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 씨와 결혼하여 유관순을 비롯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 시대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강한 책임감과 믿음으로 가정을 지켰습니다. 유관순이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기독교적 세계관은 어머니의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소제 여사는 유관순이 정동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고, 이화학당에 입학하도록 지원하며 딸의 믿음과 지적 성장을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뒤에서 딸의 길을 지켜보며, 기도로 감쌌던 인물이었습니다.

2. 신앙 속의 양육 – 어릴 적부터 심은 믿음의 뿌리


유관순의 삶과 투쟁 속에는 어머니가 심어준 신앙의 뿌리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의 길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닌, 신앙적 결단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속에서도 진리를 외치셨듯, 유관순도 정의와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 중심에는 어머니 이소제의 말씀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관순아,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한다"


이소제는 자녀들에게 항상 신앙으로 세상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믿음이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3. 유관순 순국 이후 –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믿음으로


1920년 9월,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합니다. 부고를 들은 이소제 여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이후 병을 얻어 삶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내 딸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이것이 그녀가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신앙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지만, 고통을 품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소제 여사의 믿음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딸의 죽음을 안고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어머니가, 하늘의 어머니로 승화된 순간이기도 합니다.

4. 침묵의 신앙 – 말하지 않고도 전한 복음


이소제 여사는 기독교 신앙을 조용히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유관순의 삶이 혁명적이고 격렬한 빛이라면, 어머니 이소제의 삶은 등불처럼 조용히 빛나는 길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앞에 나서기보다는 뒷자리에서 기도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하늘에서 웃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한 그녀의 삶은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말보다 강한 믿음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이소제 여사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통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어머니, 고통을 견디는 신앙인,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성도의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단지 유관순의 어머니로 기억되기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감당한 인물로 우리는 그녀를 기억해야 합니다.

 

[닮고 싶은 신앙인 ①] 한 사람을 심어라 – 함석헌 옹의 믿음과 실천이 남긴 유산

평소 존경하고, 가장 닮고 싶은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분의 이야기를 감히, 조심스럽게 여기에 풀어놓습니다. “씨알 정신으로 본 함석헌의 삶 – 오늘의 신앙을 다시 묻다” 아래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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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닮고 싶은 신앙인의 참모습


이소제 여사의 삶은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봉사보다, 조용한 헌신과 눈물의 기도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신앙은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용기입니다. 이소제 여사처럼, 눈물을 믿음으로 바꾸는 인생이야말로 진정 닮고 싶은 신앙인의 길이 아닐까요?

다음 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⑩]

“희망을 심은 의사 선교사 – 이태석 신부, 톤즈에 울려 퍼진 사랑의 진료소”
→ 다음 편에서는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가난과 질병 속에 신음하던 이들에게, 의술과 음악, 그리고 신앙으로 사랑을 심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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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관순 열전』, 독립기념관 자료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교회 여성인물사』
천안시청 공식 역사자료

◆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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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al People of Faith ⑨]

“A Mother Who Embraced Pain – Isosae, the Mother of Martyr Yoo Gwan-soon, and Her Faith Amid Sorrow”
“Embracing Her Daughter's Martyrdom with Unshaken Faith”

Introduction

Yoo Gwan-soon, who became a flame of resistance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 is one of the most iconic figures in Korean independence history. But behind her legacy stands a mother who silently bore unbearable grief. Isosae, her mother, is often forgotten in the shadows of history, yet she lived a life of profound Christian faith.
This article sheds light on the faith and life of Isosae, mother of Yoo Gwan-soon, and how she turned unbearable sorrow into unwavering trust in God.

Table of Contents

  1. Isosae, the Woman Behind a Martyr
  2. Raising a Daughter in Faith
  3. After Yoo Gwan-soon’s Death – Faith Amid Grief
  4. Silent Faith – A Gospel Without Words
  5. Her Message for Today
  6. A Portrait of True Faith

1. Isosae, the Woman Behind a Martyr

Isosae lived in Yongdu-ri, Byeongcheon-myeon, Cheonan, South Korea. She married Yoo Jung-kwon and gave birth to Yoo Gwan-soon and other children. Like many women of her time, she had limited access to education, but lived with a strong sense of duty and faith.
She supported Gwan-soon’s Christian education, encouraging her attendance at Sunday school and later at Ewha School in Seoul.
Behind the public figure that Gwan-soon became, Isosae prayed quietly and faithfully.

2. Raising a Daughter in Faith

Gwan-soon’s deep faith and moral strength came from her mother’s spiritual nurture. Her choice to join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not merely political, but a spiritual act grounded in Christian conviction.
Just as Jesus stood for truth amid suffering, Gwan-soon echoed the same courage.
Isosae taught her children to look toward heaven:
“Gwan-soon, always live with your eyes on the sky.”
She believed that true faith shines most brightly during hardship.

3. After Yoo Gwan-soon’s Death – Faith Amid Grief

In September 1920, Gwan-soon died in Seodaemun Prison. The news shattered Isosae, who fainted and fell gravely ill. Yet, she did not curse God.
“My daughter was called not by death, but by heaven.”
These words summarize her faith. Though grief-stricken, Isosae chose to interpret her daughter’s death as part of God’s calling.
Faith, she believed, does not remove suffering, but teaches how to carry it.

4. Silent Faith – A Gospel Without Words

Isosae lived her faith quietly. While Gwan-soon’s resistance was loud and bold, her mother’s life was like a soft lantern glowing in silence.
At church, she sat quietly in the back, praying. She never boasted about her loss.
“She is smiling in heaven.”
That one line became her entire testimony. Her life preached a gospel more powerful than many sermons.

5. Her Message for Today

Isosae’s life prompts us to ask:
“How do people of faith respond to pain?”
“What does it mean to raise children in faith?”
She teaches us about the strength of silent prayer, the depth of spiritual endurance, and how sorrow can be transformed through belief.

6. A Portrait of True Faith

Isosae’s story is not just one of loss, but of transformation through trust.
She didn’t speak loudly, but her tears were a prayer, her life a testimony.
True faith isn’t the absence of pain—it’s the choice to trust God through it.
She remains a shining example of a believer who turned grief into glory.

Next Preview

[Inspirational People of Faith ⑩]
“Father of the Orphans – George Müller, Who Fed Thousands by Faith Alone”
→ In the next story, we explore the life of George Müller, who raised thousands of orphans through unwavering prayer and faith.

References

  • Biography of Yoo Gwan-soon, Independence Hall of Korea
  • History of Korean Christian Women,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 Cheonan City Official Archives

#Isosae, #YooGwanSoon, #ChristianFaith, #KoreanChurch, #MotherOfFaith, #PrayerAndPain, #KoreanHistory, #MartyrFamily, #WomenOfFaith, #SilentFaith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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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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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찬바람이 스며드는 새벽. 한 노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 한 마디를 조용히 건넵니다. 누군가는 무시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피하지만, 그 말에는 오랜 고난을 이겨낸 삶의 무게와 하늘의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최춘선 할아버지’.
많은 이들이 지나치던 거리 한복판에서,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복음의 순례자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를 통해 진정한 헌신과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인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최춘선 할아버지, 노숙자의 삶으로 복음을 산 거리의 순례자
최춘선 할아버지, 노숙자의 삶으로 복음을 산 거리의 순례자

“노숙자의 삶으로 복음을 전한 순례자 – 최춘선 할아버지의 신앙 이야기”

아래 순서로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봅니다.
1. 거리의 복음 전도자, 그의 삶은 왜 특별했나
2. ‘거지 전도자’라 불린 이유
3. 절망의 끝에서 부른 은혜의 노래
4.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복음의 여정
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질문
6. 최춘선 할아버지의 믿음이 남긴 것
7.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8. 닮고 싶은 신앙인의 발자취

1. 거리의 복음 전도자, 그의 삶은 왜 특별했나


최춘선 할아버지는 화려한 교회 건물이 아닌 거리 한복판, 노숙자들과 행인들이 오가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돈도, 권력도 없었습니다. 평생 단벌 옷에 맨발로 거리를 누비며, 하루 세 끼를 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삶 속엔 어떤 목사보다도 깊은 복음의 정신이 녹아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을 직접 따라 살기 위해 노숙인의 삶을 택했습니다. 선택한 가난. 자발적인 헌신. 그것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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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지 전도자’라 불린 이유


사람들은 그를 ‘거지 전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떳떳했습니다.
하루 종일 길에서 전도지를 나누고, 구걸한 돈은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모두 가난한 이웃이나 교회, 복음전파를 위해 썼다고 알려졌습니다.

서울역, 강남, 명동… 그가 복음을 전한 거리의 이름은 화려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없이 검소했습니다. 찢어진 옷, 맨발,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따뜻한 미소와 평화의 눈빛이 있었습니다.

3. 절망의 끝에서 부른 은혜의 노래


그가 이런 삶을 살게 된 데에는 깊은 아픔의 배경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삶은 끝없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가족과의 단절, 가난, 질병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끝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품어주셨습니다. 그 후 그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루 수천 번 반복하며, 복음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4.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복음의 여정


놀랍게도 그는 돈을 벌어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구걸로 받은 돈조차도 전부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무더운 여름, 찜통 같은 날씨에도 그는 에어컨도 없는 곳에서 살며, 자신은 결코 사치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미련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의 본질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울의 해부학 ①] 세로토닌이 고갈되면, 마음도 고갈된다 – 우울증의 뇌과학적 원인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마음의 고통은 여전히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라며 넘겨버렸던 우울감, 그 실체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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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질문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과연 그 믿음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형화된 교리나 교회의 장식보다, 거리에서 외치는 그의 한 마디가 더 큰 울림이 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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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춘선 할아버지의 믿음이 남긴 것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이들이 눈물로 그를 기억했습니다. 노숙인들, 청년들, 목회자들,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위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전도지를 챙겼고, 간호사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7.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현대 사회는 점점 개인주의화되고, 경쟁은 치열해집니다.
그러나 이 거리의 순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나눔으로, 헌신으로, 용서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이죠.

그의 삶은 단지 전설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요?

8. 닮고 싶은 신앙인의 발자취


그는 유명한 목사도, 위대한 설교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예수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성경이었고, 하나의 설교였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⑨]
“고통을 품은 어머니 –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 이소제, 딸의 순국을 믿음으로 감싸다”
→ 다음 편에서는 독립운동가 유관순의 신앙과 그 어머니 이소제 여사의 삶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을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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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춘선 할아버지 생전 거리 사역 관련 간증 인터뷰
CBS ‘새롭게 하소서’, ‘극동방송’ 신앙 간증
<거리의 천사> 기독신문 칼럼, <복음을 품은 사람들> 다큐멘터리
한국기독교역사자료실

 

◆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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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s We Want to Follow ⑧]

“The Angel of the Poor – Grandpa Choi Chun-sun, the Pilgrim Who Lived the Gospel on the Streets”

“A Day I Learned How to Love People”

In front of Seoul Station, in the early morning cold, an elderly man quietly hands out gospel tracts to passersby, saying, “Believe in Jesus.” Some ignore him, others avoid him, but that single phrase carries the weight of a life shaped by hardship and filled with divine comfort. That man is Grandpa Choi Chun-sun.
Many walked past him, but he lived as a pilgrim of love and truth in the midst of the city’s bustle. This article will explore his life of faith, sacrifice, and the example he leaves for us to follow.

Table of Contents

  1. A Gospel Preacher on the Street – Why His Life Was Different
  2. Why They Called Him a “Beggar Evangelist”
  3. A Song of Grace from the Depths of Despair
  4. A Journey of Faith Without Spending a Penny
  5. The Questions His Life Asks Us
  6. What His Faith Left Behind
  7. The Message He Gives Us Today
  8. The Footsteps of a Saint Worth Following

1. A Gospel Preacher on the Street – Why His Life Was Different

Choi Chun-sun didn’t preach in grand churches. He chose the streets, where the homeless and the forgotten gather.
He owned nothing—no home, no wealth, not even a change of clothes. Yet his faith was deeper than many pastors, and his devotion clearer than many sermons.

He intentionally chose to live as the poor do, believing that was how Christ lived. His was a life of voluntary poverty, lived not in bitterness but with unwavering peace.

2. Why They Called Him a “Beggar Evangelist”

Many nicknamed him the “beggar evangelist.” But he was not pitiful—he was dignified.
He begged not for himself, but to give. Every coin he received went to others, never for his own comfort.
He walked the streets of Gangnam, Myeongdong, and Seoul Station, always with worn clothes, bare feet, and a humble smile.

3. A Song of Grace from the Depths of Despair

His path was not easy.
Born into colonial rule, suffering war and poverty, he faced family estrangement, sickness, and hunger. At the edge of despair, he met God.
He gave his life over to Christ and lived only to preach one phrase thousands of times a day:
“Believe in Jesus.”

4. A Journey of Faith Without Spending a Penny

He never spent money on himself. Even on the hottest days, he refused luxuries.
He gave every bit of what he received to others in need, to churches, or to support the Gospel.
To many, he seemed foolish. But he was one of the freest men in the world—detached from materialism, fully surrendered to faith.

5. The Questions His Life Asks Us

His life poses serious questions to modern believers.
What does it mean to “believe” in Jesus?
How are we living out that belief?

He preached not just with words, but with his entire life. He was a living Bible, a walking sermon.

6. What His Faith Left Behind

When he passed away, thousands remembered him with tears.
The homeless, young believers, pastors, and everyday people—all recalled the peace and comfort he brought.

Even on his deathbed, he whispered, “Believe in Jesus.”
He handed out tracts to nurses and prayed for strangers until his final breath.

7. The Message He Gives Us Today

In a competitive, individualistic society, his life says something radical:
“God is love.”
That love must be lived—through sacrifice, service, and compassion.

His story reminds us that faith is not a status, but a lifestyle. Not something to hold, but something to give.

8. The Footsteps of a Saint Worth Following

He wasn’t famous or wealthy.
Yet he showed us that a single life, lived in Christ, can change many.

He lived as Jesus would have.
That alone makes him a saint of our time.

 

#ChoiChunsun, #StreetEvangelist, #FaithInAction, #ChristianHero, #VoluntaryPoverty, #LiveTheGospel, #JesusFollower, #ChristianInspiration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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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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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삶, 그것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한때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던 작은 섬, 소록도. 그곳에 조용히 피어난 사랑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마리안느와 마가렛
마리안느와 마가렛 모습 재현(AI)

이 두 분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들의 상처를 보듬으며, 복음보다 더 깊은 삶의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기억하려 합니다.

 

“소록도에 핀 사랑 – 마리안느와 마가렛, 한센인을 위한 삶의 헌신”


아래 순서로 두분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봅니다.
1. 머리말 – 사랑은 조용히 스며든다
2. 소록도와 한센병의 그림자
3.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들의 한국행
4. 봉사의 삶, 사랑의 일상
5. 떠나는 편지, 눈물의 작별
6.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7. 신앙으로 피워낸 사랑의 꽃
8. 마무리 – 삶으로 복음을 살아낸 이들

1. 머리말 – 사랑은 조용히 스며든다


우리는 세상에 감동을 준 많은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삶을 헌신하고 떠난 이들의 이름은 쉽게 잊히곤 합니다. 소록도. 이 작은 섬에 40여 년간 머물며, 한센인 곁에서 생을 불태운 두 명의 오스트리아 여인이 있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들은 단지 간호사가 아니었고, 단지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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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록도와 한센병의 그림자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에 위치한 소록도는 한때 '버려진 섬'이라 불렸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격리한 곳. 사회적 낙인과 고통, 그리고 절망이 겹겹이 쌓인 그곳에서 인간다움은 사치처럼 여겨졌습니다. 환자들은 병보다 더 무서운 고립과 차별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술보다, 손을 잡아줄 따뜻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3.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들의 한국행


196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병원에서 일하던 두 여인은 한국이라는 낯선 땅, 그것도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외딴 섬 소록도로 자원하여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고, 특히 소록도는 의료 자원과 생활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안느 스퇴거는 간호사였고, 마가렛 피사렉은 물리치료사였습니다. 그들은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그 속에서 누구보다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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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사의 삶, 사랑의 일상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병원에서 숙식하며 일상의 모든 것을 환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식사, 간호, 재활치료, 목욕, 심지어 임종의 순간까지 함께했지요.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람 대접조차 받지 못했던 환자들은 이 두 여인의 손길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껴안아 주었고, 미소로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따뜻한 눈빛 하나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사랑의 손길이 어떻게 병보다 더 강한 치료제가 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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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떠나는 편지, 눈물의 작별


2005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사람은 소록도를 떠났습니다. 병들고 나이 들어 이제 더 이상 체력적으로 돌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취를 감추듯 떠나며 병자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우리의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언제나 소록도에 있을 것입니다.”
그 편지는 온 섬을 울렸고, 지금도 그 편지는 소록도 박물관에 고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6.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도 없었고, 훈장을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들의 헌신을 기억했고, 2016년에는 두 사람에게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을 수여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게 웃으며 말하던 그들의 얼굴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7. 신앙으로 피워낸 사랑의 꽃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봉사는 단순한 인도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기도했고, 환자들을 예수님을 대하듯 대했습니다. 눈먼 이들을 위해 눈물이 되어주었고, 절망하는 이들을 위해 희망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도보다 강한 복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설교하진 않았지만,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복음임을 보여준 이들이었습니다.

8. 마무리 – 삶으로 복음을 살아낸 이들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 이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사랑의 기억입니다.
한센병 환자들 곁에서, 눈물과 고통을 함께하며 살았던 두 여인.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신앙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습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믿음을 보여준 그들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음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⑧]
“가난한 자들의 천사 – 최춘선 할아버지, 노숙자의 삶으로 복음을 산 거리의 순례자”
→ 다음 편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외면한 노숙인들의 곁에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던 최춘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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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소록도병원 공식자료
마리안느와 마가렛 재단 (http://www.mm-foundation.or.kr)
KBS 휴먼다큐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 사랑으로 물들다』 (감동에디션, 2018)

 

◆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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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Blossomed in Sorokdo – The Story of Marianne and Margaret, Two Angels for Leprosy Patients

In a quiet island off the southern coast of Korea, two Austrian women became the embodiment of Christ's love. Marianne Stöger and Margaret Pissarek, both healthcare professionals, arrived on Sorokdo Island in the 1960s to serve leprosy patients abandoned by society.

They came with no fanfare, and for over 40 years, they worked in obscurity—washing, feeding, comforting, and living among the patients. They offered more than medicine: they offered dignity, companionship, and above all, love. To those ostracized by families and the world, these two foreign women were family.

Their faith in God wasn’t broadcasted with words but through every act of kindness. They did not preach; they lived the gospel. When they left quietly in 2005 due to age and illness, they left a letter saying their hearts would always remain on Sorokdo. The island wept.

Korea honored them later as honorary citizens, but the women never sought recognition. They said, "We only did what needed to be done." That humility and grace define a life wholly given to Christ.

Marianne and Margaret teach us that faith isn’t a Sunday practice—it’s a daily act of love. In a world often deafened by noise, their silent service continues to echo, reminding us that holiness often walks barefoot and unnoticed—just like them.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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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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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필 선생, 무소유로 살아낸 참 제자의 삶

산골 소녀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가르치셨던 이현필 선생님 생전 모습 재현(AI)
산골 소녀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가르치셨던 이현필 선생님 생전 모습 재현(AI)

산골 소녀들의 아버지, 이현필이 남긴 교육과 믿음의 유산


아래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1. 왜 지금, 이현필 선생인가
2. 이현필의 생애와 신앙의 전환점
3. 무소유의 삶과 제자 훈련
4. 산골 소녀들의 아버지, 교육자의 삶
5.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6. 묵상 – 소유가 아닌 사랑으로

1. 왜 지금, 이현필 선생인가


물질과 성과 중심의 시대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의 삶은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이현필 선생은 '무소유의 실천자'로, 특히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과 제자 훈련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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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현필의 생애와 신앙의 전환점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현필 선생(본명: 이봉호)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할 정도로 학업에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기독 청년 운동에 참여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그는 이후 세상의 성공을 내려놓고, 복음에 기반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 전환은 단순한 신념이 아닌, 인생 전체를 걸고 실천하는 깊은 헌신이었습니다.

3. 무소유의 삶과 제자 훈련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제자 훈련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누더기 방 한 칸에서 시작한 공동체
자신의 몫은 항상 마지막
병든 자와 약한 자를 먼저 돌보는 삶
함께 먹고 자며 복음을 삶으로 가르침
그의 제자훈련은 단지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는 훈련이었습니다.
당시 그를 따랐던 수많은 청년들이 목회자, 선교사, 사회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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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골 소녀들의 아버지, 교육자의 삶


1950년대 강원도 산골.
그는 버려진 여학생들을 위해 '예수학원'이라는 기숙형 학교를 세우고, 한 명 한 명을 품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부모가 없거나 가난으로 교육에서 밀려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는 말없이 새벽마다 기도하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밥을 함께 먹으며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아버지’라 불렀고, 그곳은 학교이자 가정이었습니다.
공부보다 먼저 가르친 것은 정직함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었습니다.

5.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


이현필 선생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정한 제자도란 무엇인가?
그는 남긴 재산도, 이름을 내건 학교도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수많은 제자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조용히 살아 움직이며, 교회와 교육 현장에 귀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6. 묵상 – 소유가 아닌 사랑으로


나는 아무것도 갖지 않았지만, 모두를 얻었다.

이현필 선생이 남긴 이 말처럼, 우리는 지금 무엇을 내려놓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의 삶은 단지 존경받을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가치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며, 무소유는 곧 온전한 자유입니다.

다음 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⑦]
소록도에 핀 사랑 – 마리안느와 마가렛, 한센인을 위한 두 천사의 이야기
한국을 찾아와 평생을 한센인과 함께 살며 그들의 손을 잡아준 두 선교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과 헌신을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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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의말씀사 「이현필 전기」
한국기독교역사자료집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사료실
예수학원 기록보존소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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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glish Version for Global Audience

“A Father to the Forgotten – The Life and Faith of Lee Hyunpil”

In a world obsessed with wealth and possession, some choose a different path—a life of spiritual riches. Lee Hyunpil, known as “the father of the mountain girls,” was one such figure. A devoted Christian, educator, and disciple-maker, he abandoned everything for the sake of the Gospel and education.

A Life of Radical Faith
Born in 1903 in Pyongyang, Lee Hyunpil was a brilliant student who could have had a successful career. However, a deep encounter with the Gospel changed the trajectory of his life.
He declared, “I will live as a disciple of Jesus,” and abandoned all worldly ambitions to dedicate himself fully to God.

Living with Nothing, Loving with Everything
Lee lived in extreme simplicity:

A mat to sleep on
Shared food, always eating last
Serving the sick before himself
His life wasn't mere poverty—it was intentional obedience to Christ’s teachings. He didn’t just preach about discipleship; he lived it. Many of his students became pastors, missionaries, and community leaders.

The Mountain Girls and the Jesus School
In the 1950s, Lee began operating a small boarding school called “Jesus School” in the Korean mountains.
He took in dozens of orphaned or poor girls, clothed and educated them, and prayed for them by name every night.

He wasn’t just a teacher—he was their spiritual father. His goal wasn’t academic success, but nurturing honest, loving disciples of Christ.

His Legacy Today
Lee Hyunpil reminds us:

Real education shapes character, not just intellect
True wealth lies in giving, not owning
Christianity means action, not ritual
In a world that glorifies gain, Lee’s legacy whispers a counter-cultural truth: to follow Christ is to love radically and live simply.

Final Reflection
“I had nothing, yet I gained everything.”

Lee Hyunpil’s life is a call to each of us:
What do we really need to live well?
Perhaps, like him, we need less—and love more.

If you'd like the next post in this series, stay tuned:

Next: “Love in Sorok Island – Marianne and Margaret, Angels for the Outcast”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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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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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잃고도 사랑을 택하다 – 손양원 목사의 용서와 복음

손양원 목사님이 양아들을 용서하고 안아주는 모습 재현

진정한 용서와 복음의 삶,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위대한 신앙

아래 순서로 글을 정리합니다.
1. 손양원 목사는 누구인가
2. 여수 사건과 두 아들의 순교
3. 가해자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맞다
4. 사랑의 원자탄, 세상에 충격을 주다
5. 우리 삶에 주는 묵직한 메시지
6. 오늘 우리가 본받을 신앙의 자세

1. 손양원 목사는 누구인가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손양원 목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혼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한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인이다. 그는 일평생 애양원을 중심으로 나환자들과 고아,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며 살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1931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나환자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했으며, 애양원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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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수 사건과 두 아들의 순교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당시, 손 목사의 두 아들인 동인과 동신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한다. 특히 아들 동인은 죽기 전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나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며 총을 맞고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이 잔혹한 비극 앞에서 많은 이들은 복수와 절망에 사로잡혔지만, 손 목사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는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다섯 가지나 된다”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1) 두 아들을 순교시켜주신 것
2) 한날에 순교케 하신 것
3) 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아들들이 순교한 것
4) 죽기 전에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게 하신 것
5) 그 가해자를 용서할 기회를 주신 것


이 감사의 고백은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과 감동을 준다.

 

3. 가해자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맞다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은 안재선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손 목사는 오히려 정부에 탄원서를 내어 그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재선을 직접 찾아가 용서하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는다.

이 놀라운 용서와 사랑은 ‘복음이 삶이 될 때 어떤 일이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실례였다. 손 목사는 이 일을 통해 원수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몸소 증명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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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의 원자탄, 세상에 충격을 주다


손양원 목사의 삶은 당시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계에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복수심이나 원망 대신 사랑과 용서로 대답한 그의 행위는 복음의 참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남긴 많은 설교와 편지들 속에는 철저한 자기부인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다. 그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기독교 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순교정신과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대표 사례로 자리 잡고 있다.

5. 우리 삶에 주는 묵직한 메시지


우리에게 손양원 목사는 단순히 위대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이 시대에 하나의 강력한 응답이다. 억울함과 상처 속에서도 용서할 수 있는 힘, 미움을 뛰어넘는 사랑,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자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분노와 분열이 넘치는 사회 속에서, 손 목사의 신앙은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이기고자만 하는 삶이 아닌, 품고 사랑하고 덮는 삶이 필요하다.

6. 오늘 우리가 본받을 신앙의 자세


손양원 목사의 삶을 묵상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복음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 용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 고통과 비극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은 가장 강한 신앙이다
● 진정한 신앙인은 사랑의 실천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교회 안의 전통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기억하고 따라야 할 ‘사랑의 기준’이다.

다음 편 예고

[닮고 싶은 신앙인 ⑥] “산골 소녀들의 아버지 – 이현필 선생의 무소유와 교육 사랑”

해방 이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교육과 신앙으로 헌신한 ‘현대의 무소유 실천자’ 이현필 선생의 삶을 조명합니다. 물질이 아닌 영혼의 가치를 따라 살았던 그의 발자취에서 진정한 나눔과 제자훈련의 모범을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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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출처
손양원 목사 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역사자료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저서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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