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무수한 것들을 기억하지만, 정작 어떤 기억은 의도적으로 반복되고, 또 어떤 기억은 침묵 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최근 한 기념비 앞에서 잠시 멈춰선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새겨진 이름과 문장을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기억은 누가 선택한 것일까?” 이 글은 그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우리의 기억을 통제하는가 – 권력과 역사, 기억의 숨은 정치”
아래 순서로 글을 정리합니다.
1. 서론: 기억은 중립이 아니다
2. 기억과 권력의 접점 – 왜 누군가는 잊히고 누군가는 기념되는가
3. ‘공식 기억’이라는 이름의 서사
4. 침묵당한 기억들 – 사라진 목소리의 정치학
5. 기념비와 교과서 – 기억의 물리적 구현
6. 기억의 정치에 맞서는 저항의 언어
7. 결론: 기억은 권력과 싸우는 방식이다
1. 서론: 기억은 중립이 아니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기억하라", "잊지 말자"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누가 기억하라고 말하고, 무엇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지, 그 정치적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작동하며, 그것은 곧 권력의 문제다. 이 글에서는 기억이 어떻게 정치화되는지를, 역사와 현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2. 기억과 권력의 접점 – 왜 누군가는 잊히고 누군가는 기념되는가
모든 집단과 국가는 자신만의 역사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권력과 결탁한다. 예를 들어 한 나라가 독립운동의 역사를 강조한다면, 이는 국가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다. 반면, 독재정권이나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은 때때로 의도적으로 '잊혀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이 거리와 공원에 남고, 누군가는 그 존재조차 지워진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기억을 설계하고 결정하는 권력의 작동 결과다.
3. ‘공식 기억’이라는 이름의 서사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은 국가나 제도, 교육체계, 언론 등을 통해 구성되는 공인된 기억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진실이라기보다는,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이 반영된 내러티브다.
대표적인 예로, 많은 국가들이 전쟁을 기념하는 방식은 패배보다는 영광과 승리를 강조한다. 전사한 이들의 이름은 새겨지지만, 민간인 희생자나 반전운동가의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 기억은 부적절하거나 불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공식 기억은 교육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되며, 새로운 세대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기억은 권력의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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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당한 기억들 – 사라진 목소리의 정치학
공식 기억의 이면에는 수많은 침묵당한 기억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국가나 사회의 주류 기억 서사에서 배제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억눌려온 기억들이다.
예를 들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 존재해 왔다. 사회적 금기, 정치적 외면, 국제적 무관심이 이 기억들을 지워왔다. 비슷하게 한국 현대사 속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도 오랫동안 ‘폭도’라는 낙인을 쓰며 왜곡된 기억 속에 머물렀다.
침묵당한 기억은 단순한 망각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체계적인 억압과 서사의 통제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다. 이 기억들은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 속에서 다시 등장하고, 때때로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힘을 가지게 된다.
5. 기념비와 교과서 – 기억의 물리적 구현
기억은 단지 마음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의 거리 이름, 동상, 기념비, 박물관, 교과서와 같은 물리적 형태로 구현된다. 이런 구체적 형상들은 권력이 기억을 어떻게 재현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준다.
기념비는 무엇을 기념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예를 들어 독일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통해 과거의 책임을 현재화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반면 어떤 국가들은 자신들의 전쟁 범죄에 대한 기념 공간을 철저히 회피한다.
역사 교과서는 또 다른 전쟁터다. 특정 사건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지, 어떤 단어를 사용할 것인지는 미래 세대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준다. ‘침략’과 ‘진출’, ‘시민운동’과 ‘폭동’은 기억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6. 기억의 정치에 맞서는 저항의 언어
공식 기억과 억압된 기억의 균열 사이에는 항상 저항이 존재한다. 그 저항은 예술, 문학, 다큐멘터리, 연극, 시민 운동, 거리 시위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의 ‘기억투쟁’ 중 대표적인 예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민사회 반응이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는 기억의 정치에 대한 강한 저항의 메시지였다.
기억의 정치에 저항하는 이들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통해 현재의 정의를 묻고, 미래의 방향을 새로 쓰고자 한다. 기억은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살아있는 힘이 될 수 있다.
7. 결론: 기억은 권력과 싸우는 방식이다
기억의 정치는 단순히 ‘기억할 것과 잊을 것’을 정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누가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주체로 인정받는가’, ‘어떤 이야기가 사회적 진실이 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정의를 세우고, 잊힘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침묵당한 기억을 꺼내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음 편 예고
[삶을 깊게 하는 인문학, 철학 제20편]
“기술과 존재 – 하이데거와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성”
다음 글에서는 하이데거의 기술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탐색합니다. 기술이 인간의 존재 방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출처
폴 코넬리오, 『기억의 정치학』
알레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들』
피에르 노라, 『기억장소(Lieux de mémoire)』
알렉시세임, “Official Memory and the Politics of Commemoration”, Memory Studies
한국기억문화연구소 아카이브
◆ View the English translation. Click below.
[Deep Humanities and Philosophy, Vol. 19]
The Politics of Memory – Who Decides What We Remember?
Recently, I stood silently before a monument, reading the engraved names and inscriptions. A question quietly rose in my mind: "Who chose to remember these people? And who was left out?" This article began from that simple, unsettling thought.
Memory is not neutral. It is not a pure reflection of the past, but a battlefield shaped by power and politics. What we remember — and perhaps more importantly, what we are made to forget — is deeply influenced by those who hold cultural, political, or institutional authority.
Memory Meets Power
In every society, memory is curated. Heroes are selected, histories are narrated, and specific pasts are honored while others are obscured. This process isn't accidental — it is often deliberate, strategic, and political.
Those whose names are inscribed on city squares, taught in schoolbooks, or praised in national holidays are not always the most just or deserving. They are, more often, the ones aligned with the dominant powers of their time.
The Narrative of Official Memory
"Official memory" refers to the authorized, institutionalized recollections of the past. Governments, education systems, museums, and media create dominant historical narratives. These memories become the foundation of national identity — glorifying victory, masking atrocities, or simplifying complexity.
The challenge is that these memories often suppress discomfort. Civilian casualties, dissenting voices, or systemic injustices are buried or sanitized. Over time, younger generations grow up believing in a filtered history, mistaking it for truth.
The Silenced Voices
Beneath the surface of official narratives lie stories untold — memories that were intentionally excluded or violently suppressed.
Take, for example, the long-silenced accounts of "comfort women" during World War II. Or the years of distortion surrounding the Gwangju Uprising in South Korea, where victims were labeled as rioters and truth was denied for decades.
Silenced memory is not accidental forgetfulness; it's political erasure. But when these memories resurface — through testimony, art, activism — they shake the foundations of complacency and demand justice.
Monuments and Textbooks: The Architecture of Memory
Memory doesn’t only live in our minds. It lives in physical spaces — street names, statues, schoolbooks, and public ceremonies.
A statue erected in a town square might commemorate a war hero, but whose perspective does that hero represent? A textbook might label a rebellion as a "riot," but what if it was a cry for democracy?
Memory is built, brick by brick, into the visible world around us. And those structures are often hard to question precisely because they seem permanent and legitimate.
Resisting the Politics of Forgetting
But memory can resist. Through protest art, literature, community vigils, or viral hashtags — people have always found ways to speak what was silenced.
In Korea, the aftermath of the Sewol ferry tragedy sparked a nationwide call to "Never Forget." Yellow ribbons, memorial walls, and collective mourning became forms of resistance — not just to grief, but to official neglect.
When people claim memory as their own, they challenge the state’s monopoly over history. They transform remembering into an act of justice.
Memory as a Weapon for Justice
The politics of memory is not just about the past. It’s about power in the present and justice for the future.
Who gets remembered determines who counts. Who is forgotten determines who continues to suffer in silence.
If we wish to build a more just and honest society, we must start by listening — especially to the stories that were never allowed to be told. Memory, when reclaimed, becomes a form of defiance. It is how the powerless speak back.
Next Issue Preview
[Deep Humanities and Philosophy, Vol. 20]
“Technology and Being – Heidegger and Human Dignity in the Age of AI”
In the next article, we will explore Martin Heidegger’s philosophy of technology and examine how artificial intelligence is reshaping the way we understand human nature and dignity in the digital age.
Sources
- Paul Connerton, How Societies Remember
- Aleida Assmann, Cultural Memory and Western Civilization
- Pierre Nora, Realms of Memory
- Alexis Seymour, "Memory, Power, and the Monument" – Memory Studies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 다른 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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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제작자의 경험과 참고자료 발췌 편집, 이미지 자체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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